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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자는 무엇을 이루시는가 — 요한복음 1:1–5
요한복음의 첫 장면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없고 모세도 없으며, 세례 요한도 아직 등장하지 않습니다. 베들레헴도, 갈릴리도, 예루살렘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사람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도 아직 나오지 않습니다.
요한은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시선을 사람이 있는 자리보다 훨씬 이전으로 돌립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헬라어 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Ἐν ἀρχῇ ἦν ὁ λόγος
엔 아르케 엔 호 로고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첫 문장에서 눈여겨볼 동사는 ἦν(엔)입니다. 기본형은 εἰμί(에이미, 있다·존재하다)이고 여기서는 미완료형으로 쓰였습니다. 요한은 말씀에 대해 “생겨났다”고 시작하지 않고 “계셨다”고 시작합니다. 실제 헬라어 본문에서도 1절과 2절은 말씀에 대해 반복해서 ἦν을 사용하고, 3절에서 만물에 대해서는 ἐγένετο(에게네토, 생겨났다·존재하게 되었다)라는 다른 동사를 사용합니다.
이 동사의 차이는 요한복음의 첫 다섯 절을 읽는 중요한 길이 됩니다.
말씀은 계셨습니다.
그러나 만물은 생겨났습니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말씀과 피조물은 같은 자리에 놓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있기 전에 말씀이 계셨다
요한은 곧바로 말씀과 하나님의 관계를 말합니다.
καὶ ὁ λόγος ἦν πρὸς τὸν θεόν
카이 호 로고스 엔 프로스 톤 테온
보통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번역합니다.
여기서 πρός(프로스)는 단순히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사실만을 말하는 표현으로 읽기보다 서로를 향하고 있는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요한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καὶ θεὸς ἦν ὁ λόγος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런데 요한은 이 놀라운 선언을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다시 말합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마치 첫 문장을 한 번 더 붙잡아 주는 것 같습니다.
아직 사람의 믿음은 없습니다.
사람의 순종도 없습니다.
기도도, 예배도, 율법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미 말씀이 계십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사람을 바라보는 출발점을 결정합니다.
사람의 생명이 사람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3절이 되면 문장의 동사가 달라집니다.
πάντα δι’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판타 디 아우투 에게네토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생겨났다.”
여기에서 πάντα(판타)는 “모든 것”, δι’ αὐτοῦ(디 아우투)는 “그를 통하여”, ἐγένετο(에게네토)는 “생겨났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같은 내용을 반대 방향에서 한 번 더 말합니다.
그를 떠나서는 생겨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1–5의 비평 헬라어 본문은 바로 이 흐름, 곧 말씀의 존재 → 하나님과의 관계 → 만물의 발생 → 생명 → 빛으로 전개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찾고 있는 첫 번째 질문이 나타납니다.
전능자는 무엇을 이루시는가?
요한의 첫 대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존재하게 하십니다.
아직 기적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지도 않았습니다.
병자가 일어나지도 않았고 죽은 나사로가 무덤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보다 먼저 있습니다.
만물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사람을 살리시는 이야기를 읽기 전에 우리는 먼저 그분을 통하여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선언을 만납니다.
그러므로 이후에 등장하는 예수의 표적들은 서로 떨어져 있는 신기한 사건들로만 읽을 수 없게 됩니다.
생명을 일으키시는 분의 이야기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리고 4절에서 요한은 ‘만물’에서 한 단어로 시선을 좁힙니다.
ζωή(조에), 생명.
ἐν αὐτῷ ζωὴ ἦν
엔 아우토 조에 엔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
여기에서도 다시 ἦν이 등장합니다.
생명은 사람이 노력해서 그에게서 얻어 낸 보상이 아닙니다.
사람이 충분히 선해진 다음 주어지는 상품도 아닙니다.
요한은 아직 사람이 아무 행동도 하기 전에 먼저 말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사람들에게 무엇이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ἡ ζωὴ ἦν τὸ φῶς τῶν ἀνθρώπων
헤 조에 엔 토 포스 톤 안트로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빛이 먼저 나오고 생명이 뒤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 → 빛입니다.
그 안에 있는 생명이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됩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빛은 단순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려 주는 지식만을 가리키는 말로 축소하기 어렵습니다. 문장 자체가 빛을 생명과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살게 하시는 생명이 사람을 비추기 시작합니다.
빛은 어둠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5절에서 처음으로 어둠이 등장합니다.
καὶ τὸ φῶς ἐν τῇ σκοτίᾳ φαίνει
카이 토 포스 엔 테 스코티아 파이네이
“빛이 어둠 가운데 비친다.”
여기서 흥미로운 변화가 있습니다.
앞에서는 “계셨다”는 ἦν이 반복되었는데, 이제 φαίνει(파이네이, 비친다)라는 현재형 동사가 등장합니다. 본문의 표현은 빛을 과거에 한 번 비추고 사라진 빛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빛은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빛이 어둠에게 먼저 물어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둠이 허락해야 빛이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이 사라진 다음 빛이 오는 것도 아닙니다.
어둠이 있는 바로 그곳에서 빛이 비칩니다.
이것은 앞으로 요한복음 전체에서 반복해서 만나게 될 방향을 미리 보여 주는 듯합니다.
병이 있는 곳으로 예수께서 가십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생수를 말씀하십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찾아가십니다.
무덤 앞에서 죽은 사람을 부르십니다.
두려워 문을 닫은 제자들 가운데 다시 오십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전능을 단순히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이라고만 읽으면 중요한 한 부분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의 첫 다섯 절에서는 그 방향이 이미 보입니다.
존재하게 하시는 방향.
생명을 주시는 방향.
어둠 가운데 빛을 비추시는 방향.
아직 사람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요한복음 1:1–5를 천천히 읽고 나면 한 가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아직 사람에게 명령한 것이 없습니다.
믿으라는 명령도 없습니다.
회개하라는 요구도 없습니다.
무엇을 증명하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하기 전에 요한은 먼저 하나님 편에서 이미 있는 것과 이루어진 것을 보여 줍니다.
말씀이 계셨습니다.
만물이 그를 통하여 생겨났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은 어둠 가운데 비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프로젝트에서 사람보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먼저 보려는 이유입니다.
신앙의 이야기를 너무 빨리 사람에게서 시작하면 우리는 곧바로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라고 묻게 됩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 질문보다 먼저 우리를 태초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사람이 무엇을 하기 전에 이미 계신 분을 보여 줍니다.
사랑하시는 전능자를 처음 만나는 자리
아직 1:1–5에는 ‘사랑’이라는 단어 ἀγάπη(아가페)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곧바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라고 본문보다 앞서 달려갈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문장이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분에게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는 것.
우리가 말하는 ‘사랑하시는 전능자’의 모습은 앞으로 요한복음을 지나면서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독생자를 주시고,
병자를 찾아가시고,
눈먼 사람을 다시 찾아내시며,
사랑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시고,
마침내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장면까지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긴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요한은 가장 먼저 기초를 놓습니다.
생명은 사람보다 먼저 있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붙들기 전에 생명이 먼저 있었습니다.
사람이 빛을 찾기 전에 빛이 먼저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첫 질문은 어쩌면 “나는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본문 앞에서 우리가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내가 존재하기도 전에 계셨고, 나의 생명보다 먼저 생명이셨던 하나님은 지금 나를 향해 무엇을 이루고 계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