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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을 가리는 것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 요한복음 1:1–5

    요한복음의 첫 문단에는 놀라운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어둠이 나오지 않습니다.

    먼저 생명이 있습니다.

    말씀이 계셨고, 만물이 그를 통하여 생겨났으며, 그 안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5절에서 어둠이 등장합니다.

    이 순서를 뒤집어 읽으면 안 됩니다.

    요한복음의 첫 이야기는 어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생명이 먼저이고, 빛이 먼저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빛 앞에 어둠이 있습니다.

    왜 생명이 있는 곳에 어둠이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 어둠은 빛을 향하여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어둠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1장 5절의 헬라어 문장은 짧습니다.

    καὶ τὸ φῶς ἐν τῇ σκοτίᾳ φαίνει,
    καὶ ἡ σκοτία αὐτὸ οὐ κατέλαβεν.

    카이 토 포스 엔 테 스코티아 파이네이,
    카이 헤 스코티아 아우토 우 카텔라벤.

    “그리고 빛이 어둠 가운데 비치고 있으며, 어둠은 그것을 붙잡지 못했다.”

    SBLGNT 본문에서도 4절의 ζωή(조에, 생명)가 사람들의 φῶς(포스, 빛)이라고 선언된 뒤, 5절에서 처음 σκοτία(스코티아, 어둠)가 등장합니다.

    문장의 순서를 그대로 따라가 보면 중요한 사실이 하나 보입니다.

    어둠이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은 창조의 주체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어둠이 사람에게 어떤 것을 주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생명은 말씀 안에 있습니다.

    빛도 그 생명에서 나옵니다.

    어둠은 이미 비치고 있는 빛 앞에서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단에서 어둠을 너무 크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요한의 첫 문장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은 어둠이 아니라 생명과 빛입니다.


    σκοτία — 어둠은 누구인가

    여기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프로젝트에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피조물을 생명에서 떼어 놓으려는 대적자의 움직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1–5에는 아직 사탄, 마귀, 악한 자라는 이름이 직접 나오지 않습니다.

    본문에 있는 단어는 σκοτία, 곧 ‘어둠’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곧바로

    “어둠은 사탄이다.”

    라고 등식을 만들어 버리면 본문보다 우리가 먼저 달려가게 됩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더 단순합니다.

    빛과 어둠의 관계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빛은 무엇을 합니까?

    φαίνει(파이네이).

    비칩니다.

    그런데 이 동사는 현재형입니다. 빛은 한때 비추었다가 꺼진 것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문장은 빛이 어둠 가운데 비치고 있다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전치사가 하나 있습니다.

    ἐν τῇ σκοτίᾳ

    “어둠 가운데.”

    빛은 어둠이 모두 제거된 다음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 안에서 비칩니다.

    요한은 생명의 빛과 어둠이 아무 관계 없이 멀리 떨어져 있다고 묘사하지 않습니다.

    빛이 어둠 한가운데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요한복음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장면이 됩니다.


    어둠은 빛을 향해 무엇을 하는가

    5절 후반에는 이 문단에서 가장 해석하기 까다로운 동사가 등장합니다.

    κατέλαβεν(카텔라벤)입니다.

    기본형은 καταλαμβάνω(카탈람바노)입니다.

    이 단어에는 ‘붙잡다’, ‘붙들어 자기 것으로 만들다’, ‘따라잡다’, ‘덮치다’ 같은 의미가 있으며, 문맥에 따라 ‘파악하다’, ‘깨닫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는 오래전부터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했다”와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했다”라는 두 방향으로 번역되어 왔습니다.

    NET 성경의 주석은 이 구절에서 κατέλαβεν을 ‘붙잡아 제압하다’는 방향으로 설명하며, 어둠이 빛을 집어삼키지 못한다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그렇다고 ‘깨닫지 못했다’는 의미의 가능성을 완전히 지워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 단어의 넓은 의미 범위는 요한복음 전체를 따라가며 흥미로운 질문을 남깁니다.

    어둠은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알아보지 못할 뿐 아니라 빛을 붙잡고 제압하려는 것일까요?

    지금 1:1–5만으로 모든 답을 결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의 행동이 그 질문에 구체적인 모습을 붙여 줄 것입니다.


    아직 강요하는 폭력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2편에서 계속 살펴볼 세 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에 붙잡힘.
    강요하는 폭력.
    죽음으로 향하는 흐름.

    그런데 요한복음 1:1–5에서는 이 세 가지가 아직 구체적인 인간 행동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위협하지도 않습니다.

    출교시키겠다고 하지도 않습니다.

    돌을 들지도 않습니다.

    죽이기로 의논하지도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신분이나 출신을 가지고 예수를 판단하는 사람도 아직 없습니다.

    그렇다면 2편이라고 해서 이런 요소를 여기에서 억지로 만들어 내서는 안 됩니다.

    이 문단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훨씬 근본적인 대비입니다.

    생명과 빛이 있고, 그 빛 앞에 어둠이 있다.

    그리고 어둠은 빛을 없애지 못합니다.

    이것이 전부에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문장이 이후 요한복음 전체를 읽는 하나의 씨앗이 됩니다.


    조금 뒤에 어둠은 얼굴을 갖기 시작한다

    요한복음이 진행되면 ‘어둠’이라는 말은 점점 구체적인 인간의 선택과 연결됩니다.

    예수께서는 뒤에서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사랑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행위가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러 나갈 때 요한은 짧게 말합니다.

    “밤이었다.”

    그때가 단순히 시계상 밤이었다는 사실을 넘어서, 요한복음 전체의 빛과 어둠의 언어를 생각하게 만드는 문장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곳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첫 문단에서는 먼저 이 사실만 기억하면 됩니다.

    어둠의 정체보다 빛의 행동이 먼저 설명됩니다.

    빛은 비칩니다.


    어둠은 빛을 만들어 낼 수도, 끌 수도 없다

    1편에서 우리는 요한이 사용하는 동사의 차이를 보았습니다.

    말씀은 ἦν, 이미 계셨습니다.

    만물은 ἐγένετο, 생겨났습니다.

    그 안에는 ζωή,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생명이 빛이 되어 φαίνει, 비칩니다.

    그런데 어둠에게 사용된 동사는 무엇입니까?

    무엇을 창조했다는 동사가 아닙니다.

    생명을 주었다는 동사도 아닙니다.

    빛을 만들었다는 동사도 아닙니다.

    어둠은 이미 있는 빛과 관계하며 등장할 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부정어 οὐ(우, 아니다·못하다)와 함께 끝납니다.

    ἡ σκοτία αὐτὸ οὐ κατέλαβεν

    어둠은 그것을 κατέλαβεν 하지 못했습니다.

    붙잡는 것으로 읽어도 실패입니다.

    이기는 것으로 읽어도 실패입니다.

    완전히 파악하는 것으로 읽어도 어둠은 빛 앞에서 한계를 드러냅니다.

    첫 문단의 마지막 말은 어둠의 성공이 아닙니다.

    어둠의 한계입니다.


    생명을 가리는 것은 생명을 만들지 못한다

    여기에서 우리 프로젝트가 앞으로 계속 살펴볼 중요한 차이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방향은 생명을 있게 하는 방향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만물이 생겨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에게 빛이 됩니다.

    반면 이 첫 문단에서 어둠은 어떤 생명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이것은 아직 대적자에 관한 직접적인 설명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선을 지켜야 합니다.

    다만 본문이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생명의 근원과 어둠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가리는 것이 아무리 어두워도 생명의 근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 차이는 이후 요한복음에서 점점 선명해질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살리시는데 누군가는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눈을 뜨게 하시는데 누군가는 그 사람을 내쫓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유를 말씀하시는데 누군가는 자신의 자리와 권력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결론을 지금 1:5에 모두 집어넣지 않겠습니다.

    지금은 씨앗만 봅니다.

    빛은 비치고 있습니다.
    어둠은 그것을 붙잡지 못합니다.


    어쩌면 문제는 어둠의 크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은 어둠을 만나면 먼저 어둠의 크기를 계산합니다.

    얼마나 강한가.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내가 이것을 이길 수 있는가.

    그러나 요한의 첫 문단은 우리의 시선을 다른 곳에 두게 합니다.

    어둠이 얼마나 큰지를 설명하기 전에 빛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려 줍니다.

    빛은 생명에서 옵니다.

    생명은 말씀 안에 있습니다.

    말씀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문장의 흐름을 거꾸로 따라가면 이렇습니다.

    어둠 앞에 빛이 있고,
    빛의 뒤에는 생명이 있으며,
    생명의 뒤에는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첫 문단에서 어둠은 결코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어둠이 등장하기 전에 생명이 있었고,

    어둠 가운데 빛이 비치며,

    문장은 어둠이 빛을 붙잡지 못했다는 말로 끝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내 삶에서 어둠이 커 보일 때, 나는 어둠이 얼마나 강한지를 먼저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그 어둠보다 먼저 계셨고 지금도 비추고 계시는 생명의 빛을 바라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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