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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능자는 무엇을 이루시는가 — 요한복음 1:6–13

    요한복음은 태초의 말씀에서 시작했습니다.

    말씀이 계셨고, 만물이 그를 통하여 생겨났으며, 그 안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고, 빛은 어둠 가운데 비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6절이 되자 화면이 갑자기 바뀝니다.

    태초에서 역사 속으로, 말씀에게서 한 사람에게로 시선이 이동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나타났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여기서 요한복음에 처음으로 이름을 가진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의 이름보다 그에게 붙은 설명입니다.

    ἀπεσταλμένος παρὰ θεοῦ
    아페스탈메노스 파라 테우.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요한은 스스로 등장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어떤 사명을 만들어 낸 사람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따라서 이 문단에서도 가장 먼저 움직이시는 분은 사람 요한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말씀은 계셨고, 요한은 보내심을 받았다

    6절의 첫 동사는 ἐγένετο(에게네토)입니다.

    “생겨났다”, “나타났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앞 문단을 기억하면 이 단어가 더욱 눈에 들어옵니다.

    1장 1절에서 말씀에 대해서는

    ἦν — 계셨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에 대해서는

    ἐγένετο — 나타났다

    라고 합니다.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분이고, 요한은 역사 가운데 나타난 사람입니다.

    이 차이는 아주 중요합니다.

    앞으로 사람들은 세례 요한에게 큰 관심을 보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지, 엘리야인지, 선지자인지 묻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그런 질문이 나오기 훨씬 전에 이미 독자에게 기준을 알려 줍니다.

    요한은 빛이 아닙니다.

    그는 빛 때문에 보내진 사람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훌륭해도 생명의 근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의 역할은 자신에게 사람들을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먼저 계신 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만 보내신 것이 아니라 증언도 준비하셨다

    7절에는 요한이 보내심을 받은 목적이 나옵니다.

    οὗτος ἦλθεν εἰς μαρτυρίαν

    “그가 증언을 위하여 왔다.”

    여기서 μαρτυρία(마르튀리아)는 ‘증언’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에 대한 증언입니까?

    빛에 대한 증언입니다.

    이 부분을 천천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행동에서 특별한 모습이 보입니다.

    하나님은 빛을 보내 놓고 사람들에게

    “너희가 알아서 찾아내라.”

    고 하지 않으십니다.

    빛이 오기 전에 증언자를 준비하시고, 그를 보내어 사람들이 빛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십니다.

    요한은 믿음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빛을 가리킵니다.

    본문은 그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통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빛은 하나님이 보내시고,

    증언자도 하나님이 보내십니다.

    사람이 믿음에 이르는 길에서도 하나님이 먼저 움직이고 계십니다.


    “그는 빛이 아니었다”

    8절은 매우 짧지만 강합니다.

    οὐκ ἦν ἐκεῖνος τὸ φῶς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할까요?

    사람은 눈에 보이는 사람을 붙잡기 쉽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

    영향력이 큰 사람,

    많은 사람이 따르는 사람,

    종교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이 가리키는 분보다 그 사람 자체가 더 크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시작부터 그것을 막습니다.

    요한은 훌륭한 증언자이지만 빛은 아닙니다.

    그는 사람들을 자신에게 모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빛을 증언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우리의 세 번째 관점, 곧 사람이 왜 눈에 보이는 힘 있는 존재의 인정을 구하는가를 살펴볼 때 매우 중요한 기초가 됩니다.

    그러나 지금 1편에서는 먼저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고 계신지를 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내시되, 그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하도록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빛을 가리키도록 보내셨습니다.


    참빛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세상으로 온다

    9절에서는 다시 중심이 요한에게서 빛으로 옮겨갑니다.

    Ἦν τὸ φῶς τὸ ἀληθινόν

    “참빛이 있었다.”

    여기서 ἀληθινός(알레티노스)는 ‘참된’, ‘진정한’이라는 뜻입니다.

    요한은 빛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빛입니까?

    참빛이 세상으로 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방향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빛을 찾아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빛이 세상으로 옵니다.

    요한복음은 계속 하나님 쪽에서 사람 쪽으로 움직입니다.

    생명이 사람에게 빛이 되고,

    빛이 어둠 가운데 비치며,

    증언자가 보내지고,

    참빛이 세상으로 옵니다.

    이 문단에서 전능은 멀리 떨어져 명령하는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가까이 오는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을 통하여 생겨난 세상으로 들어오다

    10절에는 ‘세상’이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κόσμος(코스모스), 세상.

    “그가 세상에 계셨고,
    세상은 그를 통하여 생겨났으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다.”

    여기에는 놀라운 역설이 있습니다.

    그를 통하여 존재하게 된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창조물이 창조의 근원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문단에서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세상의 실패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가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자신을 알아볼 준비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환영할 사람만 있는 곳을 선택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통하여 생겨난 세상으로 직접 들어오십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점점 더 분명해질 하나님의 방향입니다.


    “자기 것들에게 오셨다”

    11절에서는 거리가 더 가까워집니다.

    세상으로 오셨다는 말에서 이제

    “자기 것들에게 오셨다”

    라고 합니다.

    εἰς τὰ ἴδια ἦλθεν

    에이스 타 이디아 엘텐.

    자기에게 속한 곳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사람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찾아오심과 사람의 거절이 한 문장 안에서 만납니다.

    이제 요한복음의 중요한 긴장이 시작됩니다.

    빛은 오는데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생명이 오는데 사람이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의 행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2절은 δὲ, “그러나”라는 방향 전환과 함께 새로운 길을 엽니다.


    거절이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는…”

    요한은 세상이 알아보지 못했고 자기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한 뒤 이야기를 닫지 않습니다.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언가가 주어집니다.

    ἔδωκεν αὐτοῖς ἐξουσίαν

    에도켄 아우토이스 엑수시안.

    “그들에게 권세를 주셨다.”

    여기서 중심 동사는 ἔδωκεν, “주셨다”입니다.

    요한복음을 읽다 보면 ‘주다’라는 동사를 계속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십니다.

    예수께서는 생수를 주십니다.

    생명의 떡을 주십니다.

    영생을 주십니다.

    성령을 주십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리를 쟁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사람의 결정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13절은 그 자녀됨의 근원을 더욱 깊이 설명합니다.

    본문은 세 번 부정합니다.

    혈통으로부터가 아니다.

    육신의 뜻으로부터가 아니다.

    사람의 뜻으로부터가 아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 문장을 남깁니다.

    ἀλλ’ ἐκ θεοῦ ἐγεννήθησαν

    알 엑 테우 에겐네테산.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ἐκ θεοῦ, “하나님께로부터”입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새로운 생명의 출발점이 어디인지 선명해집니다.

    사람에게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가문의 힘도 아닙니다.

    인간의 결심만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은 뒤에 니고데모에게 하실 말씀,

    “위로부터 나야 한다”

    는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입니다.


    전능자는 무엇을 이루고 계시는가

    이제 문단 전체를 다시 바라봅니다.

    6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보내십니다.

    그 사람은 빛을 증언합니다.

    참빛은 세상으로 옵니다.

    자신을 통하여 존재하게 된 세상 안으로 들어옵니다.

    자기 사람들에게 찾아옵니다.

    자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납니다.

    본문의 동사들을 따라가면 방향이 분명합니다.

    보내시고,
    오시고,
    비추시고,
    주시고,
    태어나게 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도달하는 이야기에 앞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다가오시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먼저 오신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잘 알아보고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가까이 오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문단의 순서는 반대입니다.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자기 사람들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이미 오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찾아오심은 인간의 완벽한 반응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빛은 사람이 빛을 요청하기 전에 옵니다.

    증언자는 사람이 모든 것을 이해하기 전에 보내집니다.

    자녀가 되는 권세는 인간이 스스로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 낸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6–13에서 우리가 먼저 만나게 되는 전능자는 사람의 거절을 보고 물러나는 분이 아닙니다.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 안으로 들어오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람에게 새로운 출생의 길을 여십니다.

    그렇다면 이 문단 앞에서 우리의 첫 질문은 이것이 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얼마나 잘 찾아왔는가를 생각하기 전에, 나를 알아보도록 증언자를 보내시고 빛을 비추시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까지 먼저 열어 주신 분이 무엇을 이루고 계신지를 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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