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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는 사람은 왜 다른 인정을 구하는가 — 요한복음 1:14–18
요한복음 1:14에는 아주 인상적인 문장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다.”
헬라어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καὶ ἐθεασάμεθα τὴν δόξαν αὐτοῦ
카이 에테아사메타 텐 독산 아우투.
여기서 δόξα(독사)는 ‘영광’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영광을 보았다고 말하는 자리가 흥미롭습니다.
왕궁도 아닙니다.
군대가 모인 자리도 아닙니다.
세상의 권력이 한 사람 앞에 무릎을 꿇는 장면도 아닙니다.
바로 앞 문장은 이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요한이 본 영광은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높아진 자리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사람 가운데 들어오신 자리에서 보였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요한복음에서 ‘영광’을 읽는 기준을 크게 바꾸게 됩니다.
이 문단에는 아직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 없다
먼저 우리의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요한복음 1:14–18에는 아직 누군가가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행동하는 장면이 없습니다.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했다는 표현도 아직 나오지 않습니다.
출교가 두려워 자신의 믿음을 감추는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에서 곧바로
“사람의 인정을 구하지 마라”
라는 교훈을 끌어내는 것은 너무 빠릅니다.
지금 이 문단이 우리에게 먼저 주는 것은 인정 문제의 답이 아니라 기준입니다.
무엇이 정말 영광인가?
그리고 그 영광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기준을 먼저 보아야 뒤에서 사람들이 왜 다른 영광을 선택하는지를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영광과 요한이 본 영광
사람이 생각하는 영광에는 흔히 비교가 따라옵니다.
누가 더 높은가.
누가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는가.
누가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는가.
누가 더 존경받는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합니다.
그래서 영광은 쉽게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크게 보느냐의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14은 조금 다른 장면을 보여 줍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고, 그 가운데서 영광을 보았습니다.
높아져서 사람에게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 곁으로 가까이 왔습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거리를 둔 것이 아니라,
사람 가운데 장막을 쳤습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의 영광은 적어도 처음부터 사람 위에 올라서는 힘만으로 정의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가까이 오는 것,
자신을 보여 주는 것,
은혜와 진리를 나누는 것 속에서도 영광이 드러납니다.
사람의 눈은 영광을 잘못 측정할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바라볼 때 눈에 보이는 것으로 그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기 쉽습니다.
좋은 옷을 입었는가.
많은 사람이 따르는가.
어떤 자리에 있는가.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가.
이러한 기준은 사회생활에서 어느 정도 필요한 정보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존재의 가치를 결정하는 마지막 기준이 될 때입니다.
요한복음은 앞으로 이 문제를 반복해서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예수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봅니다.
가족을 봅니다.
종교적 지위를 봅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전통과 맞는지를 확인합니다.
그러면서 정작 자기들 가운데 거하시는 말씀의 영광을 놓칠 수 있습니다.
1:14–18은 그 모든 장면보다 먼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너는 무엇을 영광이라고 부르는가?
“독생자의 영광”
요한은 그 영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δόξαν ὡς μονογενοῦς παρὰ πατρός
“아버지께로부터 온 독생자의 영광.”
여기서 중요하게 들리는 표현은 παρὰ πατρός, “아버지께로부터”입니다.
영광의 근원이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군중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추천이나 투표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영광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사람의 인정 문제를 바라보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인정이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기준이 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요한복음은 뒤에서 바로 이 문제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결론을 앞당기지 않고 이 기준만 붙잡습니다.
예수의 영광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옵니다.
사람의 인정은 내가 누구인지를 만들어 주는가
사람은 타인의 시선 안에서 자신을 확인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칭찬하면 힘이 납니다.
무시당하면 마음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사랑받고 싶고, 존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인간관계 속에서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 인정이 나를 만드는가?
사람이 나를 중요하다고 말해야 내가 중요한 사람인가?
사람이 나를 받아들여야 내가 받아들여진 존재인가?
많은 사람이 나를 인정해야 내가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인가?
요한복음 1:14–18은 직접 이 질문에 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방향을 보여 줍니다.
예수의 영광은 사람들이 만들어 준 영광이 아닙니다.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따라 요한복음을 읽는 사람도 언젠가는 같은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나는 누구에게서 내가 누구인지를 받고 있는가?
은혜와 진리는 사람을 경쟁으로 몰지 않는다
요한은 그 영광을 설명한 뒤 곧바로 말합니다.
πλήρης χάριτος καὶ ἀληθείας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영광과 은혜와 진리가 한 문장 가까이에 놓여 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만들어 내는 영광은 때때로 다른 사람보다 높아져야 얻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위에 올라가면 누군가는 아래에 놓입니다.
비교와 경쟁이 뒤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수의 충만함은 다른 사람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충만함에서 우리가 받습니다.
16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았다.”
예수의 충만함은 사람을 작게 만들어 자신을 크게 만드는 충만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있는 것을 나누어 줍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영광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장면입니다.
사람의 영광은 빼앗길 수 있다
사람에게서 받는 영광은 변합니다.
어제 칭찬하던 사람이 오늘 비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였다가 흩어질 수 있습니다.
지위도 변하고, 힘도 약해질 수 있습니다.
평판도 바뀝니다.
그래서 사람의 인정이 내 존재의 중심이 되면 나는 계속 그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아직 나를 좋아하는가.
내 자리가 유지되고 있는가.
내 이름이 잊히지 않았는가.
그러나 요한복음 1장의 예수는 자신의 영광을 사람들에게서 받아 만들어 내는 분으로 소개되지 않습니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영광을 가지고 사람 가운데 오십니다.
그리고 그 충만함을 나누어 줍니다.
여기에서 인정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받아야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것을 주시는 분이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가 그의 충만함에서 받았다
16절의 중심은 매우 단순합니다.
ἐλάβομεν
“우리가 받았다.”
이 문단에서 사람은 하나님에게 무엇을 증명해서 영광을 얻는 존재로 먼저 나오지 않습니다.
받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은혜를 받습니다.
충만함에서 받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인정 문제를 생각할 때 중요합니다.
사람의 인정을 갈망하는 마음의 밑바닥에는 때때로 이런 두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내가 인정받지 못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요한은 그 질문보다 먼저 말합니다.
우리가 그의 충만함에서 받았다.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주기 전에,
하나님에게서 오는 충만함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수께서 보여 주셨다
18절은 말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께서 그 하나님을 알려 주셨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사람의 인정 문제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길이 열립니다.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보여 주시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단에서는 아직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평가하신다는 구체적인 선언까지 나아가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를 알게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상상으로 만들어 낼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보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을 때도 사람들의 수많은 눈만 바라보기보다,
예수께서 보여 주시는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먼저 보는 것이 필요해집니다.
영광은 눈에 띄는 것과 같지 않을 수 있다
사람의 인정은 눈에 잘 보입니다.
박수도 들립니다.
숫자로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좋아요 수,
직함,
재산,
사람들의 반응처럼 비교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독자에게 다른 영광을 보여 줍니다.
사람 가운데 거하시는 영광.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
자기 충만함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영광.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사람에게 보여 주는 영광.
그렇다면 사람이 찾는 영광과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영광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앞으로 그 차이를 한 장면씩 보여 줄 것입니다.
나는 어떤 영광을 바라보고 있는가
이제 1:14–18의 세 번째 시선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질문은 분명해집니다.
아직 본문에 사람의 인정 욕구가 직접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대신 영광의 기준을 먼저 봅니다.
예수의 영광은 아버지께로부터 옵니다.
그 영광은 육신이 되어 사람에게 가까이 오는 자리에서 보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며,
그 충만함을 사람에게 나누어 줍니다.
이 기준을 가지고 앞으로 요한복음 속 사람들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했다는 말씀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이미 무엇이 진짜 영광인지 조금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내가 얼마나 사랑받는 사람인지를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로 확인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람 가운데 가까이 오셔서 은혜와 진리를 나누시고 아버지의 영광을 보여 주시는 예수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다시 배우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