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시는 전능자를 따라 요한복음을 읽다

사랑하시는 전능자를 따라 요한복음을 읽다
요한복음을 펼치면 가장 먼저 한 사람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한 사건도 먼저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어디에서 태어나셨는지, 어느 마을에서 자라셨는지부터 시작하지도 않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은 우리를 아주 먼 곳으로 데려갑니다. 사람이 있기 전, 세상이 있기 전,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고민하기도 전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먼저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말씀이 계셨고,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블로그는 사람에게서 시작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물론 이런 질문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문장은 그보다 먼저 다른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무엇을 이루고 계시는가?
사람이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찾아오십니다. 사람이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먼저 사람에게 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 가운데 거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기 시작하는 자리입니다.
전능하신 분을 힘으로만 보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강한 힘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단지 상대를 제압하는 힘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물이 포도주가 됩니다.
병든 사람이 일어납니다.
배고픈 사람들이 먹습니다.
보지 못하던 사람이 봅니다.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놀라운 장면이 나타납니다.
모든 능력을 가지신 분이 붙잡히시고,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나는 패배했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이 보여 주는 전능은 단지 빼앗기지 않는 힘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주실 수 있고,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 줄 수 있으며, 죽음 한가운데에서도 끝까지 생명을 이루시는 능력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하나님의 전능을 먼저 창조하시고, 주시고, 찾아오시고, 살리시고, 사랑하시며 끝까지 이루시는 방향에서 바라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생명 앞에는 그것을 가리는 것도 나타납니다
요한복음에는 빛이 등장하자 곧 어둠도 등장합니다.
생명이 나타나자 죽음도 가까이 옵니다.
사람을 살리시는 예수 곁에서 이상하게도 예수를 죽이려는 움직임이 점점 강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문제를 곧바로 “사탄이 했다”고 말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대적자가 직접 등장하는 본문에서는 그것을 그대로 보겠습니다. 하지만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면 먼저 문장이 실제로 보여 주는 것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누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까 걱정하는가?
어떤 힘이 다른 사람에게 선택을 강요하는가?
요한복음에는 반복해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저 사람은 갈릴리 출신 아닌가?”
“우리는 그의 부모를 안다.”
“네가 우리를 가르치려 하느냐?”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출신, 신분, 제도, 권력, 숫자와 평판을 붙잡습니다. 보이는 것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을 보지 못하게 할 때입니다.
그리고 때로 그 판단은 강요로 발전합니다.
출교하겠다고 위협합니다.
사람을 내쫓습니다.
돌을 듭니다.
마침내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복음을 따라가면서 하나의 흐름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려 합니다.
보이는 것에 붙잡힘 → 강요하는 힘 → 관계의 단절과 죽음.
이 흐름이 모든 본문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문단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억지로 찾아내지 않을 것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만큼만 말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사람이 서 있습니다
사실 요한복음에서 가장 마음이 가는 존재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 사랑받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눈을 두려워하는 사람.
생명을 주시는 분 앞에 있으면서도 눈에 보이는 증거를 요구하는 사람.
예수를 믿으면서도 회당에서 쫓겨날까 두려워 침묵하는 사람.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사람.
우리와 아주 비슷합니다.
맹인의 부모는 아들이 눈을 뜬 것을 압니다. 그러나 말하기를 두려워합니다.
어떤 지도자들은 예수를 믿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그것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예수께 사랑받고 다시 부름받은 뒤에도 옆에 있는 제자를 바라보며 묻습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왜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왜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가 그렇게 중요할까요?
왜 힘 있는 사람이 나를 인정해 주는지에 따라 마음이 흔들릴까요?
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보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더 믿기 쉬울까요?
이 블로그의 세 번째 시선은 바로 이 사람을 따라가려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꾸짖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두려워 숨어 있는 사람에게 다시 찾아오십니다.
쫓겨난 사람을 찾아내십니다.
의심하는 사람에게 손을 보여 주십니다.
실패한 베드로에게 다시 질문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께서는 사람을 정죄하여 다시 하나님께 돌려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생명 안으로 다시 불러들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장부터 읽으려 합니다
이 블로그는 먼저 주제를 정한 뒤 요한복음에서 그것을 증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본문을 먼저 읽겠습니다.
현대 성경의 장과 절은 매우 유용하지만 그것만을 문단의 절대적인 경계로 삼지 않겠습니다.
헬라어 문장에서 접속사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누가 말하기 시작하는지, 장소가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하는지, 새로운 인물이 언제 들어오는지, 반복되는 단어와 동사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초기 헬라어 사본의 본문 분절도 참고하겠습니다.
그리고 항상 같은 순서로 가려고 합니다.
원어 문단 → 문장 구조 → 핵심 단어와 동사 → 본문이 실제로 보여 주는 것 → 세 관점.
세 관점은 답이 아니라 질문입니다.
한 문단에서 하나님이 압도적으로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다른 문단에서는 사람의 두려움과 인정 욕구가 중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문단에서는 강요하는 권력과 죽음의 움직임이 아주 선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 가지를 매번 똑같은 양으로 채우지 않을 것입니다.
세 관점을 본문에 넣는 것이 아니라, 세 질문을 가지고 본문 앞에 서려 합니다.
한 문단을 세 번 읽습니다
그래서 이 블로그에서는 요한복음의 한 문단을 세 편에 걸쳐 읽습니다.
첫 번째 글에서는 묻습니다.
“이 문단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이루고 계시는가?”
두 번째 글에서는 묻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가리기 위해 무엇이 움직이고 있는가?”
세 번째 글에서는 사람 곁에 서서 묻습니다.
“나는 이미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는데 왜 다른 존재의 인정이 필요한가?”
그러나 세 번째 질문의 끝에도 결국 예수께서 계십니다.
사람의 실패를 분석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예수께서 그 사람을 어떻게 다시 아버지의 사랑과 생명으로 데려오시는지를 따라갈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첫 문장은 태초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가까이에서 예수께서는 한 사람에게 아주 단순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태초의 말씀에서 한 사람의 걸음까지.
창조의 생명에서 일상의 선택까지.
빛과 어둠에서 사랑과 두려움, 폭력과 생명, 사람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까지.
이 긴 길을 천천히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매 문단 앞에서 다시 묻겠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을 위해 무엇을 이루고 계시는가?
생명을 가리는 것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사람은 누구의 말과 누구의 인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가?
예수께서는 그런 사람을 어떻게 다시 생명으로 데려오시는가?
어쩌면 요한복음을 다 읽은 뒤 우리가 발견하게 될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얼마나 강하신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모든 능력을 가지신 분이 자신이 지으신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