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29–34절 묵상|세례 요한은 무엇을 보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증언했을까?

15편. 나는 누구의 말로 예수를 알아보는가
사랑받는 사람은 왜 다른 인정을 구하는가 — 요한복음 1:29–34
세례 요한은 예수를 바라보며 말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그리고 문단의 마지막에 다시 말합니다.
“내가 보았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다.”
처음과 마지막만 보면 요한은 처음부터 예수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뜻밖의 고백이 두 번 들어 있습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다.”
31절에서 한 번.
33절에서 다시 한 번.
이 반복을 지나치면 안 됩니다.
요한은 예수를 자기 능력으로 알아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경험만으로 결론을 내린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에게서 예수에 관한 평가를 듣고 그것을 받아 적은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어떻게
“나는 알지 못하였다”
에서
“내가 보았고 증언하였다”
로 이동했을까요?
이 문단에는 아직 사람의 인정 문제가 직접 나오지 않는다
먼저 우리의 세 번째 관점을 본문에 억지로 넣지 않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29–34에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다”
고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군가의 평판을 두려워해 믿음을 숨기는 장면도 없습니다.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랑했다는 표현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의 중심을 단순히
“사람의 인정을 구하지 말라”
로 잡는 것은 본문의 무게와 맞지 않습니다.
대신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보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근거로 누구를 믿는가?
요한조차 처음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판단만으로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디에 서야 할까요?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다”
요한의 고백을 다시 봅니다.
κἀγὼ οὐκ ᾔδειν αὐτόν
카고 우크 에데인 아우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다.”
이 말에는 이상한 솔직함이 있습니다.
요한은 이미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옵니다.
예루살렘에서도 사람을 보내 그의 정체를 묻습니다.
그 정도의 사람이면 무엇이든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모르는 것을 숨기지 않습니다.
“나도 몰랐다.”
이것은 약함이라기보다 오히려 증언자의 중요한 태도로 보입니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추측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지 않습니다.
알게 된 뒤에 말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안다는 사실에서도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인정은 반드시 지위나 재산으로만 얻으려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나는 안다”는 것으로도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나는 성경을 안다.
나는 하나님을 안다.
나는 옳은 교리를 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더 잘 안다.
아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앎’이 어느 순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수단이 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그때부터 모른다고 말하기가 어려워집니다.
틀렸다고 인정하기도 어려워집니다.
새롭게 보여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기 권위를 지키기 위해 아는 척하지 않습니다.
“나도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여 주실 때까지 기다립니다.
요한은 사람들의 평가로 예수를 알아보지 않았다
요한이 예수를 알아보게 된 근거는 사람들의 소문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가 와서
“예수는 대단한 사람이다.”
라고 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르기 시작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본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요한을 물로 세례 베풀도록 보내신 분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내려와 누구 위에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분이다.”
요한에게 예수를 알아보는 기준을 주신 분은 요한을 보내신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사람들의 반응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입니다.
군중의 평가보다 하나님이 주신 표지가 먼저입니다.
성령이 내려와 머무는 것을 보다
요한은 말합니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그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다.”
여기서 요한에게 일어난 변화가 분명해집니다.
처음에는
“알지 못하였다.”
그다음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보았습니다.
그 뒤에
증언했습니다.
순서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모름 → 하나님의 말씀 → 봄 → 증언.
요한은 자신의 확신을 먼저 만들고 그 확신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고,
그 말씀에 맞는 것을 보게 하셨으며,
요한은 본 것을 증언했습니다.
사람의 인정은 확신을 빠르게 만들어 준다
우리에게는 이와 반대되는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이 믿으면 나도 믿기 쉬워집니다.
유명한 사람이 말하면 더 신뢰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칭찬하면 좋은 것 같고,
사람들이 비판하면 갑자기 의심이 생깁니다.
사람의 평가는 빠른 기준을 제공합니다.
“다들 그렇게 말하니까.”
“유명한 사람이 그러니까.”
“우리 공동체에서는 그렇게 배웠으니까.”
이런 기준들이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지혜와 경험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선 마지막 판결이 되는 순간 우리는 다른 사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보내신 분의 말씀에 따라 봅니다.
하나님은 요한에게 자기 판단을 포기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이 본문을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무조건 믿어라”
라고 읽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요한에게 분명한 표지를 주셨습니다.
성령이 내려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머뭅니다.
요한은 그것을 봅니다.
그리고 증언합니다.
따라서 믿음은 눈을 감는 행동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따라 실제로 보고 알아가는 과정이 있습니다.
요한의 증언에는 말씀과 관찰이 함께 있습니다.
“내가 보았다”
34절의 표현이 중요합니다.
κἀγὼ ἑώρακα
카고 헤오라카.
“그리고 내가 보았다.”
요한은 이제 다른 사람의 말을 반복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본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 ‘봄’ 역시 자기 기준에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어떤 것을 보아야 하는지 알려 주셨습니다.
그 말씀 때문에 요한은 성령이 내려와 머무는 장면의 의미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같은 것을 보아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장면을 해석할 기준이 됩니다.
그리고 증언하였다
다음 동사는
μεμαρτύρηκα
메마르튀레카.
“내가 증언하였다.”
요한복음에서 증언은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증언은 자신을 높이는 말과 다릅니다.
증언자는 자기가 본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합니다.
요한은
“내가 얼마나 영적인 사람인지 보라”
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분을 보라.”
처음부터 끝까지 시선은 자기 밖으로 향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인정과 중요한 차이를 만듭니다.
인정을 구하는 말은 사람의 시선을 나에게 붙잡으려 합니다.
증언은 사람의 시선을 내가 증언하는 분에게 보냅니다.
요한의 확신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았다
요한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감이 강해서가 아닙니다.
자기가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의 확신에는 근거가 있습니다.
보내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내려왔습니다.
그 위에 머물렀습니다.
요한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증언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자기 확신을 크게 만드는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신 것을 알아가면서,
자기 확신보다 더 단단한 근거 위에 서는 일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아야 내가 중요한 사람인가
우리는 때때로 비교를 통해 자기 위치를 확인합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가?
내 믿음이 더 좋은가?
내 경험이 더 깊은가?
내가 더 정확한가?
그 질문이 쌓이면 성경을 읽는 일조차 자신을 증명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몰랐다.”
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여 주셨을 때
“이제 내가 보았다.”
고 말합니다.
자기 체면을 지키기 위해 과거의 무지를 감추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증언의 중심이 자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분
요한이 알아본 예수의 특징은 이것입니다.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분이다.”
여기에도 시선은 다시 예수께 갑니다.
요한이 얼마나 잘 알아보았는지가 마지막이 아닙니다.
요한이 알아본 예수가 사람에게 무엇을 주시는가가 중요합니다.
성령을 주십니다.
따라서 사람의 생명은 요한의 뛰어난 판단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을 주시는 일에 달려 있습니다.
요한조차 그분을 가리키는 증언자일 뿐입니다.
사랑받는 사람은 모든 것을 스스로 증명할 필요가 없다
이제 세 번째 관점에서 조심스럽게 한 걸음 더 갈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인정받기 위해 자기가 옳다는 것을 계속 증명하려 할 수 있습니다.
내 판단이 맞다고.
내가 잘 알고 있다고.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고.
그러나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이라면 모든 것을 자기 힘으로 증명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요한처럼 모를 때는
“나는 모른다.”
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면
“이제 보았다.”
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증명하기보다
본 것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누구의 말이 나의 마지막 기준인가
이제 문단의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요한은 외칩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그런데 이 고백에 이르기까지 요한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셔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질문하게 됩니다.
나는 무엇을 믿을 때 누구의 말을 마지막 기준으로 삼고 있는가?
많은 사람의 평가인가?
내가 존경하는 사람의 말인가?
내 경험인가?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식인가?
그 모든 것이 도움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에게 마지막 기준은 보내신 분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의 평가와 내 확신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따라 보고 알아가며, 확인한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보다 조용히 증언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