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43–51절 묵상|예수께서는 왜 먼저 빌립을 찾으셨을까?

19편. 예수께서 먼저 빌립을 찾으셨다
전능자는 무엇을 이루시는가 — 요한복음 1:43–51
앞 문단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두 제자가 세례 요한의 증언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안드레는 형제 시몬을 찾아 예수께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이 되자 움직임이 달라집니다.
이번에는 예수께서 먼저 움직이십니다.
갈릴리로 가려고 하십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의 이름은 빌립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길게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짧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의 제자 이야기는 사람이 하나님을 얼마나 열심히 찾았는지만 보여 주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사람을 찾으시는 장면도 보여 줍니다.
예수께서 빌립을 찾으셨다
43절의 중요한 문장은 이것입니다.
καὶ εὑρίσκει Φίλιππον
카이 휴리스케이 필립폰.
“그리고 빌립을 찾으셨다.”
여기서 εὑρίσκει(휴리스케이)는 εὑρίσκω(휴리스코)에서 온 말입니다.
‘찾다’, ‘발견하다’, ‘만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앞 문단에서는 안드레가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께서 빌립을 찾으십니다.
같은 동사가 사람과 예수 사이를 오갑니다.
사람이 사람을 찾아 예수께 데려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관계보다 먼저 더 깊은 움직임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람을 찾으십니다.
“나를 따르라”
예수께서는 빌립에게 말씀하십니다.
Ἀκολούθει μοι
아콜루테이 모이.
“나를 따르라.”
여기서 ἀκολουθέω(아콜루테오)는 따라가다, 뒤따르다는 뜻입니다.
앞 문단에서 두 제자는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자발적으로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무엇을 구하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이번에는 조금 다릅니다.
예수께서 빌립을 찾으신 뒤 직접 부르십니다.
“나를 따르라.”
사람마다 예수를 만나는 방식이 똑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증언을 듣고 찾아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이끌려 옵니다.
그리고 빌립처럼 예수께서 직접 찾아 부르시는 장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심은 같습니다.
결국 사람은 예수와 함께 걷는 자리로 초대됩니다.
예수께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먼저다
신앙을 사람 쪽에서만 바라보면 이런 질문이 먼저 나옵니다.
나는 얼마나 하나님을 찾았는가?
얼마나 열심히 믿었는가?
얼마나 잘 따라갔는가?
이 질문들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계속 그보다 먼저 일어난 일을 보여 줍니다.
빛이 먼저 왔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초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께서 빌립을 찾으십니다.
제자의 삶은 사람이 하나님을 발견한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오신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찾아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찾는다
그런데 예수께 찾아진 빌립에게 곧 새로운 행동이 나타납니다.
46절로 가기 전에 45절을 보면,
εὑρίσκει Φίλιππος τὸν Ναθαναήλ
휴리스케이 필립포스 톤 나다나엘.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았다.”
재미있는 반복입니다.
43절에서는
예수께서 빌립을 찾으셨습니다.
45절에서는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습니다.
예수께 찾아진 사람이 다른 사람을 찾아갑니다.
앞 문단의 안드레와 같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를 만난 뒤 시몬을 찾았습니다.
빌립도 예수께 부름받은 뒤 나다나엘을 찾습니다.
생명은 한 사람에게서 멈추지 않습니다.
찾음이 또 다른 찾음으로 이어집니다.
빌립은 무엇을 말하는가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
빌립의 이해가 완전한지는 여기서 따로 따져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앞으로 예수가 누구신지를 훨씬 더 깊이 보여 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빌립이 자신이 만난 분을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께 찾아진 뒤,
자신도 사람을 찾아갑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한 사람을 자기 안에 가두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로 움직이게 합니다.
나다나엘은 바로 믿지 않는다
나다나엘의 반응은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묻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 20편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문제가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출신지에 대한 판단입니다.
나사렛이라는 눈에 보이는 출처가 예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하지만 이번 19편에서는 아직 그것을 중심으로 삼지 않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예수께서 무엇을 이루시는가이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빌립이 나다나엘과 긴 논쟁을 벌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가 하는 말은 짧습니다.
“와서 보라.”
다시 등장한 “와서 보라”
Ἔρχου καὶ ἴδε
에르쿠 카이 이데.
“와서 보라.”
앞 문단에서 예수께서 두 제자에게 하셨던 말과 매우 닮았습니다.
그들이
“어디에 머무십니까?”
라고 묻자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와서 보라.”
이번에는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같은 방향의 말을 합니다.
논쟁으로 모든 것을 증명하려 하기보다,
예수 앞에 직접 와 보라고 합니다.
예수와의 만남이 또 다른 만남을 부릅니다.
예수에게서 받은 초대가 사람을 통해 다시 전달됩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오는 것을 보신다
나다나엘이 예수께 옵니다.
그러자 또다시 예수의 시선이 먼저 나옵니다.
Εἶδεν ὁ Ἰησοῦς τὸν Ναθαναὴλ ἐρχόμενον πρὸς αὐτόν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셨다.”
앞 문단에서 예수께서는 시몬을 바라보셨습니다.
이번에는 나다나엘이 오는 것을 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보라,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함이 없다.”
나다나엘은 예수에 대해 아직 의심을 가지고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먼저 그 사람을 보고 계십니다.
사람은 예수가 누구인지 판단하려고 옵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예수께서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다.
“나를 어떻게 아십니까?”
나다나엘은 놀랍니다.
“나를 어떻게 아십니까?”
이 질문은 이 문단의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조금 전까지 나다나엘의 관심은 예수의 출신이었습니다.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는가?”
그런데 예수를 만나자 질문이 달라집니다.
“당신은 나를 어떻게 아십니까?”
예수의 정체를 판단하러 온 사람이,
오히려 자신이 이미 예수에게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신앙의 방향이 뒤집어지는 순간처럼 보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내가 보았다”
예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내가 보았다.”
헬라어에는 중요한 시간 표현이 있습니다.
πρὸ τοῦ σε Φίλιππον φωνῆσαι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기 전입니다.
나다나엘이 예수께 걸어오기 전입니다.
그가 예수를 직접 만나기 전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보았다.”
이 문단의 첫 부분에서 예수께서 빌립을 찾으셨고,
이제 나다나엘에게는 자신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보고 계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인식보다 먼저 움직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시간에도 예수께서는 보고 계신다
이 말씀을 너무 쉽게 모든 삶의 상황에 적용하여 신비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구체적으로 나다나엘과 예수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장면이 보여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나다나엘에게 예수와의 만남은 갑작스러운 첫 만남이었지만,
예수의 시선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를 보았다.”
사람은 이제야 예수 앞에 섰다고 생각하지만,
예수께서는 이미 그 사람을 알고 계십니다.
이것은 사랑하시는 전능자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전능은 모든 것을 아는 추상적인 능력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을 알고, 보고, 부르시는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작은 표지에서 더 큰 것으로
나다나엘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고백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거기에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으십니다.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고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μείζω τούτων ὄψῃ
메이조 투톤 옵세.
“이것보다 더 큰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이 현재 본 작은 표지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습니다.
더 큰 것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한 번의 놀라운 경험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더 깊은 앎으로 데려가십니다.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게 하신다
51절에 이르면 장면이 크게 확장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나다나엘 한 사람의 무화과나무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갑자기 열린 하늘로 확대됩니다.
한 사람을 보고 계셨던 예수가 이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중심으로 나타납니다.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내립니다.
이 장면은 창세기의 야곱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지만, 지금 본문에서 먼저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사람의 숨은 사정을 맞히는 신비한 분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하늘이 열리는 자리의 중심으로 자신을 보여 주십니다.
전능자는 사람에게 더 큰 것을 보여 주신다
요한복음의 첫 장을 돌아보면 계속 ‘봄’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빛을 봅니다.
영광을 봅니다.
성령이 내려오는 것을 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와서 보라.”
그리고 이제
“더 큰 것을 보리라.”
사람의 눈을 빼앗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하십니다.
자기 판단의 작은 틀에 갇힌 사람을 더 넓은 현실로 데려가십니다.
전능자는 무엇을 이루시는가
이제 요한복음 1:43–51에서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모아 봅니다.
예수께서 빌립을 찾으십니다.
“나를 따르라”고 부르십니다.
찾아진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게 하십니다.
의심하며 오는 나다나엘을 보십니다.
그가 오기 전부터 그를 알고 계셨음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지금 본 것으로 끝내지 않고
더 큰 것을 보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마지막에는 하늘이 열리고 인자 위에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모습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찾으십니다.
부르십니다.
보십니다.
아십니다.
그리고 더 크게 보게 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은 종종 자신의 신앙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았다.”
“내가 예수를 믿기로 했다.”
그 말이 틀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빌립도 나다나엘을 찾았습니다.
나다나엘도 예수께 걸어왔습니다.
사람의 선택과 움직임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있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빌립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너를 보았다.”
그래서 이 문단 앞에서 우리가 먼저 묻게 되는 것은
“나는 예수를 얼마나 잘 찾아왔는가?”
만이 아닙니다.
더 깊은 질문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찾기 전에 이미 나를 찾으시고, 내가 그분을 알아보기 전에 나를 알고 계시며, 내가 지금 보는 것보다 더 큰 것을 보여 주려고 부르고 계시는 분을 나는 알아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