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편. 빛이 왔는데 왜 알아보지 못하는가

생명을 가리는 것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 요한복음 1:6–13
요한복음 1:1–5에서 어둠은 아직 얼굴이 없었습니다.
빛은 어둠 가운데 비치고 있었고, 어둠은 그 빛을 붙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 어둠에 속해 있는지, 사람이 빛 앞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6–13으로 넘어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빛이 세상으로 옵니다.
증언자가 그 빛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사람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 반응은 폭력이 아닙니다.
돌을 들지도 않고, 출교시키지도 않으며, 죽이기로 의논하지도 않습니다.
더 조용한 곳에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생명을 가리는 흐름은 처음부터 칼을 들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빛이 눈앞에 와 있어도 그것이 빛인 줄 알아보지 못하는 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빛보다 먼저 사람을 바라볼 수 있다
6절에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Ἐγένετο ἄνθρωπος ἀπεσταλμένος παρὰ θεοῦ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나타났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곧바로 선을 긋습니다.
οὐκ ἦν ἐκεῖνος τὸ φῶς
“그는 그 빛이 아니었다.”
왜 요한은 이 말을 이렇게 분명하게 기록했을까요?
본문은 아직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잘못 숭배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상의 이야기를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증언자와 빛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사람을 붙잡기 쉽습니다.
말하는 사람이 보입니다.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의 옷과 행동이 눈앞에 있습니다.
반면 그 사람이 증언하는 분은 아직 익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사람의 시선이 증언자에게 멈추지 않도록 처음부터 방향을 잡아 줍니다.
요한은 빛이 아닙니다.
빛에 대하여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그를 통하여 생겼는데 그를 알지 못했다
10절에 이르면 문장은 아주 놀라운 역설을 보여 줍니다.
ἐν τῷ κόσμῳ ἦν
καὶ ὁ κόσμος δι’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καὶ ὁ κόσμος αὐτὸν οὐκ ἔγνω
“그가 세상에 계셨고,
세상은 그를 통하여 생겨났으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여기서 κόσμος(코스모스), ‘세상’이라는 단어가 세 번 반복됩니다.
그가 세상에 계십니다.
세상은 그를 통하여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합니다.
같은 단어가 반복되면서 이상한 긴장이 만들어집니다.
자신을 통하여 존재하게 된 세상이 자신의 근원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동사는 ἔγνω(에그노)입니다.
기본형은 γινώσκω(기노스코), ‘알다’, ‘알아보다’, ‘인식하다’라는 뜻입니다.
본문은 세상이 그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세상에 있었습니다.
문제는 존재하지 않아서 볼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분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과 알아보는 것은 다르다
이 부분에서 우리 프로젝트의 두 번째 관점과 중요한 연결점이 생깁니다.
우리는 앞으로 계속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에 붙잡히는 흐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직 사람들이 어떤 외모나 신분을 보고 예수를 판단하는 장면이 직접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1:10을 곧바로 “육신의 눈 때문에 실패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본문이 말하는 것은 더 기본적인 것입니다.
보는 것과 아는 것은 같지 않다.
눈앞에 있다고 해서 그 존재의 참된 의미를 알아보는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요한복음에서 이 문제가 계속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예수의 고향을 압니다.
부모를 안다고 말합니다.
안식일 규정을 압니다.
성전의 크기를 압니다.
떡을 먹은 사실도 압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예수가 누구인지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 씨앗이 이미 1:10에 놓여 있습니다.
세상은 그를 통하여 생겨났으나 그를 알지 못하였다.
알아보지 못함은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이어진다
11절에서는 문장이 더 가까워집니다.
εἰς τὰ ἴδια ἦλθεν
“자기 것들에게 오셨다.”
그런데 이어지는 문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οἱ ἴδιοι αὐτὸν οὐ παρέλαβον
“자기 사람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서 παρέλαβον(파렐라본)은 παραλαμβάνω(파랄람바노)에서 온 말로, ‘받아들이다’, ‘영접하다’, ‘자기에게로 받아들이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10절에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11절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문장의 움직임을 보면 작은 변화가 보입니다.
알아보지 못함 → 받아들이지 않음.
이것이 아직 폭력은 아닙니다.
그러나 관계의 단절은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빛은 가까이 왔는데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생명의 근원이 자기에게 왔는데 문을 열지 않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앞으로 훨씬 더 거친 모습으로 발전하게 될 거절의 초기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절을 너무 빨리 악마화하지 않는다
여기서도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6–13에는 아직 사탄이 직접 등장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사탄이 세상의 눈을 가렸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을 구별해야 합니다.
본문이 직접 보여 주는 것은 이것입니다.
참빛이 옵니다.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합니다.
자기 사람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정도까지가 본문의 직접적인 진술입니다.
그 원인을 모두 대적자의 직접적인 행동으로 설명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아직 본문이 말하지 않은 곳까지 나가게 됩니다.
지금은 먼저 사람과 세상이 빛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바라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생명을 가리는 흐름은 여기서 아직 이름을 가진 공격자가 아니라,
알아보지 못함과 받아들이지 않음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강요하는 폭력도 아직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의 두 번째 글에서 계속 살펴볼 세 흐름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보이는 것에 붙잡힘.
강요하는 폭력.
죽음의 방향.
1:6–13에서는 두 번째와 세 번째 흐름이 아직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선택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내쫓겠다는 위협도 없습니다.
정치적 힘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죽이려는 계획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단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굳이 폭력까지 끌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여기서는 폭력보다 훨씬 앞선 자리,
사람의 인식과 수용의 자리를 봐야 합니다.
빛을 알아보지 못하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가 반복되고 굳어지면, 앞으로 다른 반응으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첫 단계만 보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증언자를 먼저 보내셨다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놓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다고 해서 빛이 아무 설명 없이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왜 보내셨습니까?
빛을 증언하도록.
7절은 말합니다.
ἵνα πάντες πιστεύσωσιν δι’ αὐτοῦ
“모든 사람이 그를 통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사람이 알아보지 못할 수 있다는 현실 앞에서 증언자를 보내십니다.
빛을 가리키는 목소리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문단에서 인간의 알아보지 못함과 하나님의 행하심은 대조됩니다.
사람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아볼 수 있도록 증언을 보내십니다.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빛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생명을 가리는 흐름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거절이 마지막 문장이 아니다
만약 1:6–13이 11절에서 끝났다면 분위기는 상당히 어두웠을 것입니다.
“자기 사람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문장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2절에는 방향을 돌리는 작은 단어가 있습니다.
ὅσοι δὲ
“그러나 누구든지.”
모두가 알아보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거절한 것으로 이야기가 닫히지도 않습니다.
그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그들을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
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앞의 οὐ παρέλαβον, “받아들이지 않았다”와 12절의 ἔλαβον, “받아들였다”가 서로 마주 봅니다.
빛 앞에서 사람의 반응이 갈립니다.
거절하는 사람이 있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인간을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존재로 그리지 않습니다.
빛 앞에서 반응이 나타납니다.
생명을 가리는 것은 사람의 자리를 대신 만들지 못한다
그리고 13절에서 본문은 더 깊은 문제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람들은
혈통으로부터도,
육신의 뜻으로부터도,
사람의 뜻으로부터도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습니다.
여기에서 2편의 관점으로 읽을 때 중요한 대비가 생깁니다.
세상은 빛을 알아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거절이 새로운 생명의 근원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새 생명의 출처는 여전히 ἐκ θεοῦ, “하나님께로부터”입니다.
생명을 가리는 것이 생명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 점은 1:1–5의 어둠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어둠은 빛을 붙잡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1:6–13에서는 세상의 알아보지 못함과 사람의 거절도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는 새로운 생명의 길을 닫지 못합니다.
어둠은 이제 ‘알아보지 못함’이라는 얼굴을 얻는다
첫 문단에서 어둠은 추상적인 단어처럼 보였습니다.
σκοτία — 어둠.
그런데 두 번째 문단에 들어오면 어둠과 직접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빛 앞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반응이 조금씩 구체화됩니다.
빛이 왔는데 알아보지 못합니다.
자기에게 왔는데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직 돌은 없습니다.
아직 출교도 없습니다.
아직 십자가도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과의 관계가 끊어질 수 있는 작은 시작은 보입니다.
빛을 빛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요한복음은 앞으로 이 작은 거절이 어떤 모습으로 발전하는지를 천천히 보여 줄 것입니다.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가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나는 봤으니까 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첫 장부터 그 확신을 흔듭니다.
세상 안에 빛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그를 통하여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단순히 빛이 없느냐의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빛이 있는데도 그것을 무엇으로 보고 있느냐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익숙한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에 지나치고 있는 것은 없는가?
내가 예상한 모습이 아니어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없는가?
하나님이 이미 빛을 비추고 있는데도 나는 다른 증거가 와야 한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요한복음 1:6–13은 아직 그 질문의 모든 답을 주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앞에 하나의 긴장을 놓습니다.
참빛은 이미 세상에 왔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묻게 됩니다.
나는 빛이 오지 않아서 보지 못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와 있는 빛을 내가 익숙한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