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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왜 사람의 인정이 필요한가

수퍼이슈 2026. 9. 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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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는 사람은 왜 다른 인정을 구하는가 — 요한복음 1:6–13

요한복음 1:6–13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둘 사이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자기 자신에게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스스로 자신의 사명을 만들어 낸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자기 힘으로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습니다.

문단의 처음과 마지막이 모두 사람의 근원을 자기 자신 밖으로 돌려놓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단을 사람의 인정이라는 질문으로 읽을 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누구에게서 내가 누구인지를 받고 있는가?


요한은 자신이 빛이 아니라는 자리에서 시작한다

요한복음에 처음 이름을 가지고 등장하는 사람은 세례 요한입니다.

그런데 그를 소개하는 방식이 독특합니다.

ἀπεσταλμένος παρὰ θεοῦ

아페스탈메노스 파라 테우.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그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첫 기준은 그의 능력이나 명성이 아닙니다.

누가 그를 보냈는가입니다.

그리고 곧이어 더 분명한 말이 나옵니다.

οὐκ ἦν ἐκεῖνος τὸ φῶς

“그는 그 빛이 아니었다.”

이 문장은 요한을 낮추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요한의 자리를 분명하게 해 줍니다.

그는 빛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일은 빛을 증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릴 때 다른 사람의 인정을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됩니다.

내가 반드시 중심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바라보는지가 중요해집니다.

내가 빛이어야 한다면 누군가가 나보다 더 밝게 보이는 순간 불안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빛이 아니라 빛을 가리키도록 보내진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내 존재의 의미는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크게 보는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에게서 왔고, 무엇을 위해 보내졌는지가 더 중요해집니다.


사람은 쉽게 증언자에게 시선을 멈춘다

8절은 굳이 다시 말합니다.

요한은 빛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빛을 증언하기 위해 왔습니다.

본문은 아직 사람들이 요한에게 잘못된 영광을 돌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이상의 이야기를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질문은 남습니다.

왜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사람과 빛을 이렇게 선명하게 구별하는가?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는 사람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앞으로 요한복음 전체를 보며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증언자는 보입니다.

목소리도 들립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모으는지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어느 순간 그 사람이 가리키는 분보다 그 사람 자체를 더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독자의 시선을 계속 돌려놓습니다.

요한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빛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빛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자유를 줍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빛이 되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인정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빛의 근원이 아니라면, 내가 모든 사람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해서 빛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디에서 자신의 신분을 얻는가

12절에 이르면 더 놀라운 말이 나옵니다.

ὅσοι δὲ ἔλαβον αὐτόν

“그러나 그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어집니다.

ἔδωκεν αὐτοῖς ἐξουσίαν τέκνα θεοῦ γενέσθαι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그들에게 주셨다.”

여기서 우리의 시선을 붙드는 단어는 τέκνα θεοῦ(테크나 테우)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사람의 정체성을 말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신분은 사람들이 붙여 주는 이름이 아닙니다.

사회가 인정해서 생기는 자리도 아닙니다.

좋은 가문에 속해서 얻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ἔδωκεν, “주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됨은 먼저 선물로 받은 자리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뒤 얻어 낸 칭호가 아닙니다.


혈통도 아니고 사람의 뜻도 아니다

13절은 이 문제를 더욱 깊이 파고듭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디에서 태어나지 않았는지를 세 번 말합니다.

οὐκ ἐξ αἱμάτων

“혈통들로부터가 아니며.”

οὐδὲ ἐκ θελήματος σαρκός

“육신의 뜻으로부터도 아니며.”

οὐδὲ ἐκ θελήματος ἀνδρός

“사람의 뜻으로부터도 아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단 하나의 근원을 남겨 둡니다.

ἀλλ’ ἐκ θεοῦ ἐγεννήθησαν

알 엑 테우 에겐네테산.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다.”

여기서 문장의 무게가 어디에 놓이는지가 중요합니다.

ἐκ θεοῦ.

하나님께로부터.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 존재가 되는 근거가 다른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동의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혈통이 그 신분을 만들어 주지도 않습니다.

사람의 결정이 그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납니다.


그런데 왜 사람의 인정을 그렇게 필요로 하는가

이제 우리는 이 연재의 세 번째 질문 앞에 설 수 있습니다.

나는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이름을 받았는데 왜 다른 사람에게서 또 나의 가치를 확인받고 싶어 하는가?

하지만 여기에서도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6–13에는 아직 사람들이 실제로 사람의 영광을 구하거나, 출교를 두려워하거나, 다른 사람의 평가 때문에 믿음을 숨기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장면은 뒤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본문이 이미 모두 주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12–13절은 앞으로 그 문제를 바라볼 기준점을 먼저 세웁니다.

사람이 누구인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근원이 어디인가?

본문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그렇다면 앞으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인정을 두려워하는 장면을 만날 때 우리는 이 자리로 돌아와 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신분보다 사람에게서 받는 신분이 더 중요해진 것은 아닌가?


사람의 인정은 쉽게 조건을 붙인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고, 공동체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싶습니다.

그 마음 자체를 악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 인정이 내 존재의 마지막 근거가 될 때입니다.

사람의 인정에는 흔히 조건이 붙습니다.

“이렇게 해야 너를 받아들이겠다.”

“우리 기준에 맞아야 네가 우리 사람이다.”

“이것을 증명해야 가치가 있다.”

그 조건을 잃는 순간 인정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은 전혀 다른 방향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은 혈통이나 인간의 평가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납니다.

이 차이는 앞으로 매우 중요해집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눈을 뜬 사람은 결국 회당 밖으로 쫓겨납니다.

사람이 부여하던 공동체의 자리를 잃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가 쫓겨났다는 말을 들으시고 그를 찾아가십니다.

사람이 밀어낸 자리에서 예수께서 다시 그 사람을 만나십니다.

그때 우리는 지금 1장에서 읽은 이 말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의 근원은 사람의 결정이 아니다.


내가 빛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

세례 요한의 자리는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때때로 사람들의 인정이 필요한 이유를 단순히 “칭찬받고 싶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더 깊은 곳에는 이런 마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여야 한다.

내가 중심에 있어야 한다.

내가 빛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 존재의 의미가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첫 번째 증언자를 소개하면서 말합니다.

“그는 빛이 아니었다.”

이 말은 모욕이 아닙니다.

오히려 해방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나는 빛일 필요가 없습니다.

빛은 이미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근원일 필요가 없습니다.

생명은 이미 말씀 안에 있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구원자가 될 필요도 없습니다.

나는 다만 내가 받은 자리에서 빛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크게 보는가보다 내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가 더 중요해집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은 경쟁에서 이겼다는 뜻이 아니다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또 다른 우월감의 재료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다른 사람보다 특별하다.”

라고 읽으면 다시 사람과 사람을 비교하는 자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사람 사이의 서열이 아닙니다.

출생의 근원입니다.

혈통도 아니고,

육신의 뜻도 아니며,

사람의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이 신분은 다른 사람 위에 올라서는 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아는 자리에 가깝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아져야 내가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인정받으려 애쓰기 전에 받은 것을 본다

요한복음은 여기서 사람에게 먼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인정을 구하지 마라.”

그보다 먼저 무엇을 보여 줍니까?

빛이 왔습니다.

그 빛을 증언하도록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행동이 사람의 행동보다 먼저입니다.

사람의 인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이 더 강한 사람이 되는 것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먼저 내가 이미 무엇을 받았는지를 보는 것일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에게서 태어났는가?

누가 나에게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는가?

누가 나를 비추고 있는가?

이 질문들이 사람의 평가보다 먼저 자리 잡기 시작할 때, 사람의 인정은 여전히 기쁘고 중요할 수 있지만 더 이상 내 존재 전체를 결정하는 마지막 판결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받은 이름보다 먼저 있는 이름

앞으로 요한복음의 사람들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릴 것입니다.

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갈릴리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이도 있습니다.

귀신 들렸다는 말을 듣는 예수도 있습니다.

회당에서 쫓겨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서로의 신분과 출신과 권위를 계속 확인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이야기에 앞서 요한은 하나의 문장을 놓았습니다.

τέκνα θεοῦ

“하나님의 자녀.”

그리고 그 뒤에 설명합니다.

ἐκ θεοῦ ἐγεννήθησαν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다.”

사람이 붙여 주는 이름보다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의 근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물어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높이 평가할 때도,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도,

내 자리가 흔들릴 때도,

나는 어디에서 다시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있는가?

나는 아직도 사람들의 인정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만들어 가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에서 이미 받은 나의 이름을 알아가기 시작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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