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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편. 하나님이 가까이 오셨는데 왜 보지 못하는가

수퍼이슈 2026. 9. 4.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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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가리는 것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 요한복음 1:14–18

요한복음 1:14–18에는 이상한 긴장이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사람이 볼 수 있는 자리까지 오셨습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런데 문단의 마지막에 이르면 또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보았다고 했는데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두 문장이 함께 있을 수 있을까요?

이 사이에 요한복음이 앞으로 계속 다루게 될 중요한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사람은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눈앞에 무엇인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언제나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묻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가까이 오셨는데도 무엇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분을 보지 못하게 하는가?


이 문단에는 아직 대적자가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먼저 우리가 세운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요한복음 1:14–18에는 사탄이나 마귀가 직접 등장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를 위협하지도 않습니다.

출교가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돌을 드는 사람도 없고, 예수를 죽이기 위한 계획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 문단을 읽으며

“대적자가 사람의 눈을 가리고 있다”

고 곧바로 단정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가는 해석이 됩니다.

이 문단이 직접 보여 주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말씀은 육신이 되셨고, 사람 가운데 거하셨으며, 그 영광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육신의 눈으로 완전히 붙잡을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살펴볼 것은 대적자의 직접적인 공격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식의 한계입니다.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보이는 자리로 오셨다는 뜻이다

14절은 선언합니다.

καὶ ὁ λόγος σὰρξ ἐγένετο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 σὰρξ(사르크스), 육신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와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께서 사람이 살아가는 현실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걸으실 수 있는 몸,

먹을 수 있는 몸,

피곤할 수 있는 몸,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는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문제는 단순히

“하나님이 너무 멀리 있어서 사람이 볼 수 없다”

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가까이 오셨습니다.

문제는 이제 다른 곳으로 이동합니다.

가까이 오신 하나님을 사람은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보이는 것이 오히려 전부가 될 수 있다

우리 프로젝트에서 계속 살펴보려는 한 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에 붙잡히는 것.

다시 말하지만 보이는 것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자체가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진실 전체라고 생각하는 순간입니다.

앞으로 사람들은 예수를 보면서 여러 가지를 판단할 것입니다.

“저 사람은 나사렛 사람 아닌가?”

“우리는 그의 부모를 알고 있지 않은가?”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올 수 있는가?”

사람들은 틀린 정보를 가지고만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정보는 실제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디에서 자랐는지 압니다.

가족도 압니다.

눈앞의 몸도 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보이는 사실들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판단하는 마지막 기준이 될 때입니다.

육신이 된 말씀을 보면서도 단지 육신만 볼 수 있습니다.


영광은 어디에서 보이는가

요한은 말합니다.

καὶ ἐθεασάμεθα τὴν δόξαν αὐτοῦ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다.”

여기에서 ἐθεασάμεθα(에테아사메타)는 바라보다, 주목하여 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요한이 말씀께서 육신이 된 바로 그 문장에서 영광을 보았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영광을 생각하면 흔히 육신의 연약함과 반대되는 것을 떠올립니다.

영광은 높아지는 것이고,

육신은 낮아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영광은 강함이고,

육신은 약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둘을 떼어놓지 않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고, 바로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영광의 모습’과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영광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앞으로 본문을 따라 확인해야 할 질문입니다.

지금 1:14에서 분명한 것은 하나입니다.

영광은 사람에게서 멀어진 곳에서만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 가운데 거하시는 말씀에게서 보입니다.


힘으로만 하나님을 찾으면 가까이 오신 하나님을 놓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가장 쉽게 떠올리는 것이 힘입니다.

전능하시다면 압도적으로 강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한눈에 알아볼 만큼 위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독자의 기대를 흔듭니다.

전능하신 말씀께서 육신이 되십니다.

그리고 사람 가운데 ἐσκήνωσεν, 장막을 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요한은 바로 그곳에서 영광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오직 눈에 보이는 압도적인 힘으로만 찾는다면,

사람 곁으로 가까이 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강한 자를 굴복시키는 힘은 알아보면서,

약한 사람에게 다가가는 힘은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높아지는 영광은 알아보면서,

자신을 낮추어 사람 가운데 거하는 영광은 낯설어할 수 있습니다.


은혜와 진리 가운데 어느 하나만 붙잡는 것도 위험하다

14절의 말씀은

πλήρης χάριτος καὶ ἀληθείας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고 표현됩니다.

χάρις, 은혜.

ἀλήθεια, 진리.

둘이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때때로 둘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한쪽만 붙잡고 싶어 합니다.

진리만 붙잡으면 사람의 잘못을 판단하는 데 익숙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은혜를 자신의 편안함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꾸어 버리면 진실을 마주하지 않으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본문보다 멀리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이 직접 말하는 것은 단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혜와 진리가 함께 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가려면 우리가 미리 만들어 놓은 하나님 상에 예수를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게서 나타나는 은혜와 진리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모세를 붙잡느냐 예수를 붙잡느냐의 단순한 대립이 아니다

17절은 말합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이 구절을

“모세는 나쁘고 예수는 좋다”

라는 단순한 대립으로 읽으면 본문의 흐름을 놓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율법 역시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문제는 율법 자체를 악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문단의 시선은 계속 예수에게 향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고,

그에게서 영광을 보았으며,

그 충만함에서 우리가 받았고,

은혜와 진리가 그를 통하여 왔습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어떤 제도나 지식도 하나님 자신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 점은 앞으로 중요해집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붙잡다가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놓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가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뒤의 본문에서 하나씩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그리고 18절은 인간의 한계를 분명히 선언합니다.

Θεὸν οὐδεὶς ἑώρακεν πώποτε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육신의 눈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이 하나님을 정의하는 마지막 권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보고 싶어 하는 하나님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자신이 익숙한 모습이 아니면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남는 길은 무엇입니까?

요한은 우리를 추측으로 보내지 않습니다.

18절 후반이 중요합니다.

ἐκεῖνος ἐξηγήσατο

“그분이 알려 주셨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알아맞히라고 하지 않으신다

ἐξηγήσατο(엑세게사토)는 설명하다, 풀어내다, 알려 주다는 뜻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수께서 풀어 보여 주십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방식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 너희가 알아맞혀 보아라”

가 아닙니다.

자신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그 보여 주심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싶다면 우리의 상상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누구를 찾아가시는가.

누구를 살리시는가.

어떤 사람의 말을 들으시는가.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시는가.

자신을 거절하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시는가.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무엇을 이루시는가.

요한복음은 그 모든 장면을 통하여 하나님을 풀어 보여 줄 것입니다.


생명을 가리는 것은 때로 잘못된 하나님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한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1:14–18이 직접적으로 “사람들이 잘못된 하나님 상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본문이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으며, 예수께서 그분을 알려 주셨다”

고 말한다면 중요한 질문은 생깁니다.

나는 하나님을 예수에게서 배우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내가 만들어 놓은 하나님을 예수에게 요구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이런 분이어야 한다.

전능자는 반드시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한다.

우리의 기대가 하나님을 판단하는 빛이 되는 순간,

바로 곁에 장막을 치고 계신 말씀을 보면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가리는 것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거대한 악의 모습으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예수께서 보여 주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문단에는 폭력이 없다

그래서 요한복음 1:14–18의 2편은 비교적 조용합니다.

폭력도 없습니다.

출교도 없습니다.

죽음의 계획도 없습니다.

사탄의 직접적인 등장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단에서 그것들을 억지로 찾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대신 더 근본적인 문제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인간의 눈은 하나님을 완전히 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려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예수께서 하십니다.

이 사실을 놓치면 사람은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재단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때 눈은 열려 있는데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빛을 가리는 것보다 빛을 보여 주시는 분이 더 먼저다

그러나 이 2편에서도 마지막 중심은 사람의 한계가 아닙니다.

본문의 마지막 동사는 어둠이나 인간의 실패가 아닙니다.

ἐξηγήσατο.

“그가 알려 주셨다.”

사람이 하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한계보다 먼저,

그리고 그 한계보다 더 크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 주시는 일이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됩니다.

우리 가운데 거합니다.

영광을 보여 줍니다.

충만함에서 은혜를 줍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알려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질문도 단순히

“무엇이 내 눈을 가리고 있는가?”

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질문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자신을 어떻게 보여 주고 계시는가?

나는 하나님을 내가 기대하는 힘과 성공과 눈에 보이는 결과로만 판단하고 있는가?

아니면 육신이 되어 사람 가운데 거하시고, 은혜와 진리로 자신을 풀어 보여 주시는 예수에게서 하나님을 다시 알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서 믿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미 예수 안에서 자신을 보여 주셨는데도 내가 원하는 모습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분을 지나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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